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프 헤어베어거 (문단 편집)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1부 ==== 1936년, 헤르베르거는 [[오토 네르츠]]의 뒤를 이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의 2대 감독으로 부임한다. 네르츠의 해임 이유는 [[1936 베를린 올림픽|1936년 올림픽]]에서의 부진이었다. 이때 독일 국가대표 자체가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의 실력있는 팀이었기에 자국 올림픽에서의 부진은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의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네르츠는 이 조치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한동안 헤르베르거의 상급자로 남아있었다. 1938년 5월에 네르츠가 직에서 사임할 때까지 그들은 상당한 권력 투쟁을 펼쳤다.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월드컵]]을 앞두고 독일은 이전 대회보다 더욱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프리츠 스체판]], [[파울 야네스]], [[에른스트 레너]], [[오토 지플링]] 등 이전 대회의 핵심 선수들이 건재했고 [[알빈 키칭거]], [[루트비히 골트브루너]], [[요제프 가우헬]], [[안드레아스 쿠퍼]] 등 새로운 얼굴들의 가세도 큰 힘이 되었다. 이들의 조화로 독일은 1937년에 치렀던 11경기에서 10승을 거뒀고 3월, [[브로츠와프|브레슬라우]]에서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덴마크]]에 거둔 8대0 대승은 말 그대로 그들의 높은 경기력을 선보인 한판이었다. 독일은 그저 뛰고 저돌적인 축구만 한다는 편견을 독일도 기술적인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새로운 면으로 바꿔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 병합|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통해 마찬가지로 한 실력을 자랑하던 [[오스트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오스트리아 대표팀]]을 흡수하면서 엄청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 윗선이 개입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일 대표팀에 오스트리아 선수들의 비율을 6대5나 5대6으로 비슷하게 맞추길 원했는데 이유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외부적으로 화합한 것처럼 보여야한다는 것이었다. 양국 선수들간의 플레이 스타일 차이도 컸고 오스트리아 선수들이 독일에 감정이 좋았을 리 없었는데다 그렇다고 독일 선수들도 오스트리아 선수들을 포용하려 들지도 않았으니 그들의 갈등은 상상이상으로 컸다.[* [[1974 FIFA 월드컵 서독|1974년 월드컵]] 때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에도 이때의 독일보다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감독 [[리누스 미헬스|리뉘스 미헐스]]는 자신의 페르소나 [[요한 크루이프|요한 크라위프]]에 선택과 집중을 택했고 크라위프와 불편한 관계였던 [[빌리 판데르카윌런]]과 [[얀 판베베른]]을 대표팀에 부르지 않는 것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은 리그도 진행[* 1938년 독일 전국 챔피언십은 1938년 3월말부터 진행되었고 4강까지 진행되고 나서 월드컵 휴식기를 가졌다.]되는 두세달남짓. 이건 헤르베르거와 네르츠가 아니라 동서고금의 어떤 감독이 와도 불가능한 미션이었고 네르츠는 이런 되도 않는 미션에 스트레스를 받기 싫었는지 5월 12일에 대표팀에서 탈출했다. 헤르베르거는 이 불가능한 미션에 저항도 해보고 변호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본선 경기에서도 이 6대5 미션을 지켜야했던 헤르베르거는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라운드|1938년 프랑스 월드컵 1라운드]]에서 졸전 끝에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와 재경기까지 치렀지만 2대4로 패배하며 허무하게 대회 10등으로 탈락했다.[* 간혹 히틀러가 이 대회의 졸전에 분노해서 선수들을 다들 수용소로 보내버렸다란 루머가 도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게 사실이면 감독이었던 이 양반이 히틀러의 권력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던 1942년까지 국가대표팀을 지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첫 월드컵을 타의로 인해 말아먹은 헤르베르거는 6대5 원칙을 폐기시키고 한동안 선수들의 화합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그는 30대 노장들을 대체할 [[헬무트 쇤]]같은 새로운 선수들의 중용에 힘쓰며 [[1940 하계 올림픽|1940년 도쿄 올림픽]]과 [[1942 FIFA 월드컵|독일 개최를 목표로 한 다음 월드컵]]에 대비했다. 그렇게 1939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에 2대3으로 패했지만 1938년 월드컵때보다 독일 대표팀은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 등은 독일과 시합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독일은 동유럽권 국가들과 주로 경기를 가졌는데 1939년 9월 24일엔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에 1대5로 대패하기도 했다. 헤르베르거는 1933년 이후 나치당원이 되었고 나름 국가의 정책에 타협했지만 그로 인한 이득은 없었다. 전쟁 발발 후에도 나치는 [[A매치]]를 계속 열라는 명령을 보냈지만 헤르베르거는 선수 대부분이 [[독일 국방군]]에 징집되었고 연락이 다 끊어졌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나치는 축구 선수들을 조금씩 최전방에서 떨어뜨렸고 헤르베르거는 축덕이자 에이스 파일럿 [[헤르만 그라프]]에게 전방에 축구 선수들을 보내지 말라는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1942년 11월, [[슬로바키아 축구 국가대표팀|슬로바키아]]를 상대로 독일은 마지막 시합을 치렀고 이 시합은 독일이 5대2로 승리를 챙겼다. 그리고 이 시합에서 뛴 선수들은 이 경기를 끝으로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가 되었다. 대표팀 경기는 중단되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우리가|리그]]는 진행되었기 때문에 심사를 돕고 추가 교육 과정을 조직하기 위해 전국의 클럽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는 점령된 [[노르웨이]]에서 부대 감독관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1944년 1월 29일 베를린쇤베르크에 있는 헤르베르거의 아파트가 폭격을 당했을 때도 그는 [[오슬로]]에 있어서 무사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에바는 베를린에 대한 폭격이 증가하기 전에 바인하임에 있는 부모에게 오래 전에 피신했고 그도 예방 차원에서 허가를 받아 이사를 했다. 1944년 6월이 되어서야 그는 다시 오슬로로 소환되었다. 1944년 9월 25일, 47세의 헤르베르거는 군인으로 징집되었지만 복무한 지 며칠 만에 병으로 제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